“감사 구덩이가 뭡니까?”

제가 자라던 어린 시절, 겨울이 다가올 무렵이면 가정마다 겨울을 잘 보내기 위하여 어른들이 준비하는 것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한 가지는 겨울동안 땔 연탄이나 장작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가정의 경제적인 형편에 따라 몇 백 장 또는 몇 십 장의 연탄을 광에다 들여놓거나 산을 오르내리며 장만한 장작을 광이나 부엌 가까이에 쌓아놓곤 하였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뒤뜰 땅바닥에 구덩이를 파고 항아리를 묻은 후 배추김장이나 무 김장을 하여 넣어두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농촌이나 한옥에 사시는 분들은 김장독에 김치를 담그기도 하겠지만, 대부분 아파트 문화인 도시에서는 김장독 대신 김치 냉장고에 김장을 담그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긴긴 겨울 따뜻한 아랫목에 엉덩이를 붙이고 둘러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기억과 밥맛을 잃거나 특별한 반찬이 없을 때 김장독에서 김장김치 한 포기를 가져다가 손으로 찍 찍 찢어 먹으며 밥을 단숨에 꿀떡 넘기던 기억은 생각만 하여도 군침을 돌게 합니다. 추위를 대비하여 땔감과 김장을 준비하는 우리 선조들의 지혜는 이렇듯 우리들에게 ‘유비무환’이라는 교훈과 함께 아름다운 추억거리를 제공해줍니다. 겨울이 오기 전 땅에 구덩이를 파고 항아리를 묻은 후 김장을 담아 두었다가 필요할 때 멋지게 찾아 쓰는 것을 보며, 저는 오늘도 구덩이를 파고 항아리를 묻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혹독한 겨울이 오기 전 평온한 날에 저의 마음 한 가운데 구덩이를 파고 항아리를 묻은 후 ‘감사의 제목’들을 찾아 차곡차곡 넣어 둡니다. 그러다가 인생의 겨울을 만나 두려움과 괴로움, 불안과 좌절, 외로움과 배신감이 엄습해올 때마다 마음 속 구덩이에 담아놓은 감사의 목록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위로와 격려, 신뢰와 사랑 등 따뜻하고도 소중한 기억들을 회상함으로써 훌륭히 극복하는 것입니다.

상담자를 훈련시키거나 ‘자기존중감’ 또는 ‘긍정적인 자아개념’을 증진시키는 프로그램 중에 자신의 장점을 찾아 기록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부분은 ‘장점’을 찾으라고 하면 무언가 큰 상을 받은 일이 있거나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랑할 만한 일을 찾기 때문에 장점 찾기를 매우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에서 ‘장점 목록’ 대신에 ‘감사의 목록’을 작성하게 합니다. ‘나에게 없으면 매우 불편하지만, 있으면 다행스러운 것’을 찾아 감사의 목록을 만들어 보라고 말입니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연령에다가 30개를 보태어 기록하라고 주문합니다. 1학년생인 경우 19살이라면 49개(19세+30개=49개)의 감사목록을 작성하게 합니다. 학생들이 볼멘 목소리로 질문합니다. “교수님, 감사할 것이 어디 있다고 그렇게 많이 찾으라고 하십니까?”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학생들에게 일단 자신의 신체를 살펴보면서 그 부분이 없다면 매우 불편하지만 있어서 다행한 부분을 찾아 감사의 목록을 만들어 보라고 합니다.

사물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어디로든 걸어 다닐 수 있는 다리와 발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만져볼 수 있고 포옹할 수 있으며 들 수 있는 팔과 손이 있어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향기와 산소를 들이마실 수 있는 코가 있어 감사합니다.

견해를 표현할 수 있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입이 있어

감사합니다.

살아있다는 자체가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자신의 가족을 둘러보며 감사의 목록을 찾아보게 합니다.

부모와 형제가 있어서 감사합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아계셔서 감사합니다.

돌아가신 부모님의 산소가 가까이 있어 감사합니다.

가족들 간에 격려와 사랑이 있어 감사합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갈 수 있는 집이 있어 감사합니다.

그다음에는 주위의 관계를 바라보며 찾아보라고 합니다.

창신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좋은 교수님들을 만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멋진 선배와 친구들을 만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훌륭한 시설에서 공부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장래의 꿈과 비전 갖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자연환경 속에서 감사의 제목을 발견하게 합니다.

사계절이 뚜렷한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마음껏 무료로 공기와 바람, 바다와 강물을 사용하게 하심 감사합니다.

학생들이 작성해온 ‘감사목록’은 거의가 동일하게 시작할 때의 고민은 하나도 없이 해당 개수를 초과 작성한 목록의 말미에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어 과제물을 부여한 교수로서 흐뭇한 마음 이루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늘 불평만 하고 살았는데, 이렇게 많은 감사거리가 저에게 있음이 너무 감사합니다.”

삶속에서 걱정거리를 만나 낙심될 때, 저는 발달심리학 교재 속에 소개되어 있는 생명의 탄생과정인 ‘정자와 난자의 수정’을 기억하며 힘을 얻을 때가 있습니다. 3억 내지 4억 개의 정자가 남자의 몸에서 출발하여 여자의 몸에서 한 개의 정자와 한 개의 난자가 만나 수정 후 인간이 탄생된다는 과학적 사실 말입니다.

결국 ‘나’라는 존재는 4억대 1, 아니 1억을 감한다 하더라도 3억대 1의 경쟁을 뚫고 나온 존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공무원 시험을 친다. 고시를 친다. 대기업 입사 시험을 치른다.’ 하더라도 수백 대 1의 경쟁률은 있지만 억대 1의 경쟁률은 존재하지 않는데,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이미 3억대1의 경쟁률을 뚫고 태어났으니 낙심할 필요가 없다는 자신감과 자부심을 갖게 되고 무한한 감사의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이메일의 닉네임을 만들 때 ‘감사 구덩이’라고 작명하여 사용해오고 있습니다. 내 마음 한 모퉁이에 구덩이를 파고 날마다 체험하는 감사의 제목을 그 곳에 묻어 놓았다가 인생의 겨울에 하나씩 끄집어내어 회복과 치유의 기쁨을 맛보려고 말입니다.

저의 메일을 받아 본 학생들이 질문을 합니다. “교수님, 감사구덩이가 뭡니까?” “아, 그거...요즘 말로 고치면 ‘날마다 감사’ 라는 기다.” 현재 저의 이메일 닉네임은 학생들의 독해력을 고려(?)해 ‘날마다 감사’ 라고 쓰고 있습니다.